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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길에 보는 가로수에 대한 궁금증

3. 가로수의 역사

 





우리나라의 가로수 역사



우리나라의 산림제도에 관하여 조선 이전은 문헌상 고증할 길이 없고, 조선시대에 와서 가로수가 처음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단종 1(1453) 의정부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주나라의 제도를 보면 길가에 나무를 줄로 심는다는 기록이 있고, 지난날 이를 본받아 서울 근방의 도로변에 나무를 많이 심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나무를 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라버리는 일도 있고 해서 내년 봄부터는 서울 교외 도로의 양편에 땅의 성질을 감안해서 소나무·배나무·밤나무·회나무·버드나무 등 알맞은 것을 심도록 하고 그 보호를 철저히 하라는 명이 내려졌다2,[1],[2]. 정조3(1779)에는 예조로 하여금 능원(陵園) 주변의 소나무 등의 수목의 벌채를 금한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묘소 주위나 길가의 노거수가 가로수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문서를 통해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가로수는 고종32(1895) 내무아문에서 각 도의 도로 좌우에 수목을 식재하도록 시달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능원 주변 이외에도 거리를 알기 위하여 길가에 인공적으로 나무를 심었다는 설도 있다. 5( 2km)마다 오리나무를, 10( 4km) 또는 20(8km)마다 시무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5리마다 심었던 오리나무는 오리나무는 솔방울과 비슷하게 열매가 달려 겨울에도 금세 알아볼 수 있어서 길라잡이 나무로서는 그만이었을 것이다. 오리나무는 산기슭이나 개울가에서 잘 자라는 흔한 나무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자란 오리나무를 보고 이정표로 착각해서 길을 잘못 든다고 해도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돌아가도 좋을 정도로 5리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으니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10리는 제법 먼 거리이기 때문에 오리나무 같은 흔한 나무로 심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그래서 10리 또는 20리마다 심은 나무는 다름 아닌 시무나무이다. 시무나무는 어릴 때는 다소 험상궂은 가시가 달리고, 비옥한 땅을 좋아해서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는다. 또 엽전을 닮은 열매가 열린다. 이렇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있고 눈에 잘 띄어 이정표 나무로서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괴나리봇짐을 걸머지고 길을 가는 나그네들은 뒤에 이 나무 앞을 지나가게 될 누군가를 위하여 해진 짚신을 나뭇가지에 덜어두고 눈에 잘 띄도록 했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참으로 넉넉한 풍경이다[3]. 충청도 예산과 강원도 춘천 등 일부 지역에서 구전돼 오는 민요인 나무타령에도 오리나무가 나온다[4].







하지만, 오리나무가 5리 거리를 표식하는 이정표로 심었다는 것이 낭설이라는 주장도 있다[5]. 일제 강점기인 1921년 우리말로 전해 내려오던 오리나무를 차자(借字)해서 五里木(오리목)으로 표기했을 뿐이고, 오리나무가 이정표로 심어졌다면 5리마다 심은 이유, 심었다면 5리 구간 내에 줄지어 심었는지, 5리마다 한군데씩 심었는 지, 어느 지역에 식재했던 사업인지, 하필 오리나무를 심었는지에 대한 신뢰할 만한 출처와 정보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리나무


오리나무는 자작나무과에 딸린 잎지는 큰 키나무로 유리목(楡里木또는 적양(赤陽)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다조(茶條)라고 한다뿌리에서 공기 중에 있는 질소를 흡수할 수 있으므로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고 또 땅을 기름지게 하므로 사방목으로 귀중하게 여겼다.

오리나무는 잎과 잔가지 껍질을 약으로 쓴다성질은 서늘하고 맛은 떫고 매우며열을 내리고 독을 푸는 작용이 있다술을 많이 마셔서 간이 나빠진데에는 오리나무 잔가지나 껍질을 달여서 마시면 간기능이 회복된다.

오리나무는 술을 물이 되게 하는 작용이 있다고 한다옛날에 술을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갈 때도 꼭 술병을 가지고 다녔는데어느날은 술병마개를 잃어 버려 길 옆에 있는 오리나무 잎을 뜯어 뭉쳐서 술병마개로 썼다가 나중에 술을 마시려고 보니 술이 물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실제로 오리나무를 술에 오랫동안 담가두면 술이 묽어진다술이 화기(火氣)를 많이 품고 있는 반면에 오리나무는 화기를 진정시키는 작용이 있어서 술의 독성이 완화되는 것이다.

잎이나 잔가지를 봄이나 여름에 채취하여 그늘에 말려 약으로 쓴다. 30~40g에 물 2되를 붓고 3분의 1이 되게 달여서 하루 3~5번에 나누어 마신다달인 물은 붉은 빛깔이 나고 맛은 떫고 텁텁하다만성 간염이나 간경화에는 하루 100~150g씩 많은 양을 달여서 복용하는 것이 좋다간경화로 오래 고생하면서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별 효과를 못보던 사람이 오리나무를 복용하여 완치되는 것을 보았다오리나무 한가지만을 써도 효과가 있지만 조릿대 잎동맥(겨울을 지난 어린 보릿잎), 도토리 등을 더하여 쓰면 효과가 더 빠르다.

대구에 있는 어느 한약방은 간질환을 잘 고치는 것으로 한때 이름이 높았는데그 비결이 바로 오리나무와 어린 보릿잎이었다오리나무 잎과 잔가지를 채취하여 몰래 창고에 가득 쌓아두고 또 보리를 비료와 농약을 치지 않고 심어서 어린 싹을 거두어 말려서 쌓아두고 간 치료약으로 썼다.

 





조경학자들에 따르면 가로수가 정책적으로 식재되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부터다. 일제는 경성에서 지방으로 뻗어가는 신작로를 건설하면서 대로변에 나무를 많이 심었고, 이때부터 인기를 끈 나무는 수양버들이다. 성장속도가 빠르고 다 자라면 잎가지가 길게 드리워 그늘을 만드는 데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옛날부터 산수화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선비들이 좋아하는 나무이다 보니 일본의 벗나무와는 달리 조선인들의 반감을 피할 수 있었다. 물을 좋아하는 수양버들은 한강 중랑천 안양천 등 주요 하천변을 따라 집중적으로 심어졌다. 1975년 서울 시내에 있던 걸로 집계되는 가로수 6,800그루 가운 데 36%를 차지할 정도로 과거에는 가장 흔한 가로수였다[6].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봄이면 하얀 솜털처럼 서울 하늘을 가득 메우는 수양버들 숫나무가 뿌리는 홀씨 때문이었다. 시민들의 호흡기 알레르기와 천식을 유발하는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서서히 베어지기 시작했고, 2014년 기준으로 서울 전체 가로수 29 3389그루 중에서 31그루만 남을 정도로 가로수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수양버들의 빈자리는 양버즘나무가 메웠다. 플라타너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나무는 공해가 점차 심해지던 1980년대 서울에 가장 적합한 나무였다. 세계 4대 가로수(피나무, 느릅나무, 마로니에, 양버즘나무)에 들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았다. 대기오염이 심한 곳에서도 잘 자리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 등 해외 순방에 나선 중앙정부와 서울시 관료들이 대거 수입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그러나 양버즘나무의 영광도 채 20년을 가지 못했다. 1년에 2m씩 다라는 빠른 성장속도로 웬만한 4,5층 상가 건물높이만큼 자란 양버즘 나무는 일조권과 간판가림에 대한 민원을 촉발시켰다. 결국 서울시는 1990년대를 기점으로 가로수종 다변화에 나서기 시작했고, 은행나무와 회화나무, 소나무, 벗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을 식재하기 시작했다.





외국의 가로수 역사[7]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로수는 기원전 10세기에 하말라야 산록에 조성된 그랜드 도란그도로로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인도의 켈커타에서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에 걸쳐있는 도로로써, 일부는 돌로 포장되었으며 중앙과 좌우에 3열의 가로수가 연속적으로 식재되어 있었고, 알렉산더 대왕이 대군을 통솔하고 이 도로를 진군해 갔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는 도로 양측에 버짐나무의 가로수가 있었다고 한다. 로마에는 신전 앞의 광장과 스타디움 앞의 산책로, 주요 간선 도로에는 이태리 사이프러스류가 식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로마교외의 왕족별장에는 플라타너스, 사이프러스, 월계수 등의 가로수가 있었다는 것을 당시의 그림에 의해 알 수 있다.



중국에는 고대부터 가로수에 관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기원전 5세기 주나라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수도 낙양으로 통하는 길에는 많은 가로수가 있었고, 여행자들이 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물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가로수로는 북숭아, 자두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원전 3세기 진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국도건설에도 업적을 남겼다. 당시에 폭 40m정도의 도로가 건설되었고, 가로수로는 소나무가 식재되었다. , 이 시대에 이미 가로수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대장이라는 관직명이 있었다고 한다. 7세기 초기 수나라 때에 농민에게 상을 주어 운하 양안에 버드나무 다로수를 식재하였는 데 이건이 수제류라는 장대한 하안 가로수이다. 7~10세기 당나라 때에는 장안시의 가로에는 이 복숭아 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이 식재되었고, 현종황제 때에는 가로수에 관한 제도가 만들어져 장안의 도시가로와 성내 궁원들에 과수가 식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내의 가로에는 회화나무가 식재되있고, 장안시에는 수양버들, 복숭아, 자두, 느릅나무가 있었다. 송나라 때에는 중국남부가 원산인 Bambaxceiba를 가로수로 썼고 지방에는 소나무류를 이용한 기록이 있다. 이 시대까지의 가로수종은 대부분 중국 원산의 것이었으나, 청조 후반 이후에는 서양과의 교역이 활발해지고 또 역외에 신시가지가 확대되면서 아카시아나무, 버짐나무, 이태리포플라 등 외래 수종도 많이 도입되었다.



일본의 가로수는 신공황후 2(202)에 황후가 역로(驛路)를 정하고 녹나무를 심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최초의 가로수를 심은 것은 1867년 근대도시정책에 의한 경관향상 목적의 요꼬하마의 마차도였다.



   프랑스는 1552년 앙리2세가 국내 주요 도로에 유럽느릅나무를 식재하도록 법률을 제정한 기록이 있어 16세기부터 유럽에서 가로수가 제도적으로 식재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1647년 독일 베를린에서는 에일가든을 기점으로 동쪽으로 4~6열의 팔피나무 가로수가 식재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동베를린에 남아 있는 유명한 대로이다. 이 아름다운 가로수 대로가 후에 파리의 Blouervard 조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는 1625년 당시의 런던 시장이 모아필즈에 산책로를 조성하였는 데, 이때의 가로수 식재가 영국 도시 가로수 조성의 효시라 볼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계속되는 도시인구의 집중과 급격한 도시 확장으로 도시계획이 추진되었고 간선도로의 건설에 따라 가로수 식재도 아주 활발해졌다. 특히 19세기 후반 이래 유럽에서는 구 중세 도시의 성벽이 철거되거나 매몰되었고, 이러한 성벽터를 정지하여 환상 또는 부분적으로 가로수가 식재된 넓은 산책로가 건설되었다.







[1] 경남도민일보, 2013.9.22, http://gn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5807

[2] 조선을 구한 신목 소나무, 2013, 강판권, 문학동네

[3] 일간투데이, 주중석기자, 2010.9.14, http://www.d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873

[4] 재미있고 유익한 민요 나무노래’, 얼치기 농사꾼, 2014.2.19, https://m.blog.naver.com/bty0418/140206400847

[5] 한국식물생태보감1, 2013.12.30,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430841&cid=46686&categoryId=46694

[6] 동아일보이철호기자, 2015.10.17, ttp://news.donga.com/3/03/20151017/74215785/1

[7] 가로경관 향상방안 연구보고서산림청, 2009.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