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초의 역사
중국에서는 1세기에 씌어진 ‘서경잡기’에 BC3세기말 한나라 고조때 민월왕이 밀랍초 200개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전국시대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허난성 뤄양현진춘의 무덤에서는 받침접시 중앙에 못이 세워진 고대 청동제 촛대와 뚜껑의 절반이 경첩으로 여닫히는 원추형 상자모양의 청동제 촛대 등 9기가 출토되었다. BC3세기의 진시황 무덤에서도 고래기름으로 만들어진 초가 발견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의 사원에서도 계피를 끓이고 남은 찌꺼기로부터 만들어진 왁스로 초를 만들었다. 티벳에서는 야크버터를 이용하여 초를 만들었다. 이와 같이 초가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시기는 동서양 모두 BC3세기 무렵으로, 촛대의 재료와 모양까지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그 시대에 동서양 문화의 접촉·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 BC4세기 이후에는 초의 재료로 밀랍과 둘둘 말린 쌀종이(rice paper)를 심지로 해서 종이로 만든 튜브로 형틀을 이용하여 초를 만들었다[1].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촛불이 사용된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초의 사용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경주 궁성과 인접한 월지(月池-안압지)에서 출토된 보물 1844호 ‘경주 월지 초심지 가위(慶州 月池 金銅燭鋏)’로 초의 심지를 자르는 특수한 용도로 만들어진 가위이다. 금동으로 만들어진 이 초심지 가위는 특이하게, 자르는 날의 둘레에 반원형으로 세운 테두리가 있어 잘라진 초심지가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이 가위는 전면에 새겨진 섬세한 어자문(魚子文-물고기 알 모양의 둥근 문양)을 통해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초의 사용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는 삼성미술관 리움에는 출토지를 알 수 없는 국보 제 174호 금동수정장식촛대 (금동감옥촉대 金銅嵌玉燭臺)이다. 금동수정장식촛대는 수정이 박힌 금동제 촛대 한 쌍이다[2].
이 시대는 등잔불도 귀하던 시절이라, 기름을 상온에서 고체로 유지하는 초는 만들기 어려운 귀하고도 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초는 귀하여 일부 귀족층을 위한 의례용 수요에 그치고, 궁궐이나 왕실에서 부와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궁중에서도 초가 매우 귀하여 횃불을 대용하게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기 이후부터 각종 초가 개발되고 후기에는 초의 사용이 서민층까지 확대되었다. 초의 소비가 늘어나게 됨에 따라 초의 이용 방법이 여러 가지로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반 백성이 밀랍으로 만든 초를 사용하는 경우는 관혼상제에 한정될 정도로 귀했다. 초의 수요에 대해 공급이 미치지 못하여, 세종은 초의 사용을 금하고 기름등잔으로 대신하게 했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밀랍초를 사용하므로 밀봉(蜜蜂)의 절종(絶種)을 염려한 세종이 초의 사용을 엄금한 것이다. 호남·호서지방에서 조금씩 생산되던 밀랍은 매우 귀하여 다른 재료를 사용한 여러 가지 초가 많이 만들어졌다. 밀랍초 외에 소기름이나 돼지기름으로 만든 돈지초(豚脂燭), 우지초(牛脂燭)가 생산되기도 하였으나, 질이 좋지 않아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였다. 일반 서민의 밀랍초 사용은 관청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밀랍초의 사적 매매가 금지되고 관혼상제때에 관청에서 배급받아 사용하게 하였다[3].
우리나라에는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파라핀초도 같이 전해졌으며, 당시 서양에서 들어온 물건에 접두사 '양-'을 붙이는 경향에 따라 '서양에서 들어온 초'라는 의미로 양초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극에 보면 시대를 불문하고 촛불을 사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밀랍을 이용한 초의 사용은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고증이 안된 옥의 티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서 19세기 파라핀초가 생산된 이후의 시대라 할지라도 양초는 비싼 가격 때문에 그리 많이 사용하지는 못했다. 처음 서울 구경을 한 시골 양반이 어찌 하다가 양초를 구입하였다가 용도를 알 수 없어 백어(白魚)인줄 알고 국을 끓여 먹었다는 옛날이야기는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초[4]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었던 초에는 자초(刺燭)· 홍대초(紅大燭)· 포초(布燭)· 밀초(蜜燭,밀랍초)· 용초(龍燭)· 화초(畵燭)· 내점초(耐點燭)· 풍전초(風前燭)· 만리초(萬里燭)· 성초(聖燭)· 지초(脂燭)· 잡초(雜燭)· 마초(麻燭)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자초는 갈대를 베로 감싸 묶고 그 표면에 납(蠟)을 바른 가장 원시적인 초로, 연기와 그을음이 심했다고 한다. 중국 고대의 예법을 정리한 ’주례(周禮)’에서 사훤씨(司煊氏)가 제사 때 바쳤다는 분촉(墳燭)이 그 원형일 것으로 추측된다. 초목을 다발로 묶은 홰의 형태에 싸리로 심을 하고 베로 얽어맨 다음, 겉에 엿과 꿀을 발라 불을 밝힌 것이다. 분촉에서 엿과 꿀 대신에 밀랍을 발라 개량한 것이 바로 자초이다. 조악하여 나중에 밀초로 대체 된다.
홍대초는 포초(布燭)의 하나로, 다섯 ‘새’의 거친 베에 붉은 물을 들인 납(蠟)을 발라 길이 1척(尺) 보다 크게 잘라 만든 초이다. 여기에서 ‘새’는 피륙의 날을 세는 단위로서, 그 수가 클수록 피륙의 직조(織造) 밀도가 높다. 다섯 새의 베면 의복으로는 쓸 수 없는 매우 성글고 거친 직조이다. 홍대초는 고려 때부터 조선 초까지 궁궐이나 사찰 등 주로 상류층의 길ㆍ흉사에 두루 쓰였던 것으로, 조선 태종(太宗) 때 그 사용을 금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전국의 길례(吉禮)와 흉례(凶禮) 때 홍대초 사용을 금하고, 대신 횃불을 쓰도록 하였다. 비용만 허비하고 이익이 없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다음 왕인 세종은 다시 포초(布燭)을 바치라는 명을 내린다. 태종의 검약을 숭상했던 뜻을 받들면서도 이런 명령을 내린 까닭은, 주로 싸리나무 횃불이 잠깐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탄 불똥이 마구 떨어져 혹 휘장에 연소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밀랍의 밀초는 황밀초와 백밀초가 있다. ‘황초’라고도 하는 황밀초는 담황색의 반투명 색채를 띠며, 봉밀을 물에 끓여 불순물을 제거한 다음 밀랍을 판 위에 놓고 굴대로 굴려 원통형으로 만든 후 굴대를 빼고 심지를 끼워 마무리 한 것이다. 밀초는 대부분 이와 같은 굴림법에 의해 만들었지만, 조선후기에는 밀랍을 녹여 대통 속에 넣어 굳히는 주촉법(鑄燭法)도 이용하였다. 백밀초의 백랍은 황밀을 고아 장지에 걸러 짜내는 정제과정을 거쳐서 만들기도 했지만, 사철나무나 광나무(물푸레나뭇과의 상록 활엽 교목), 쥐똥나무에 서식하는 백랍충의 분비물을 가열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사철나무깍지벌레과의 곤충인 백랍충 수컷의 애벌레가 숙주 식물에 붙은 부분에 백색 납질을 분비하게 되는데, 이것을 채취하여 백랍의 원료로 쓴 것이다.
용초는 백랍을 주홍(朱紅) 안료로 물들여 용을 양각한 것이며, 화초는 백랍을 물들여 모란을 장식한 밀초의 하나이다. 용초는 고급스럽고 너무 귀해 주로 궁중이나 사찰에서 사용하였으며, 화초는 조선후기 민간에서 혼례 때 사용하였다. ‘화촉(華燭)’이라 하여, ‘화촉을 밝히다’는 말 자체가 혼례의 상징으로 쓰이게 되었다. 조선후기 혼례복이 관복을 착용한 것처럼, 일반 서민에게도 평생 한 번,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인 혼례식만큼은 신분적 질서를 뛰어넘어 호사를 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내점초 또는 내점랍초는 황밀과 송지(松脂), 회화나무 꽃 각 1근과 속돌 4냥을 함께 녹여 등심포(燈心布)로 심지를 만든 것으로, 하루 종일 켜도 한 치 정도밖에 닳지 않아 내점초라는 명칭을 얻었다. 속돌 또는 부석(浮石)이란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갑자기 식어서 된 다공질(多孔質)의 가벼운 돌로, 경석(輕石) 또는 수포석(水泡石)이라고도 한다.
풍전초는 마른 옻칠ㆍ찧은 실고사리ㆍ질산칼륨ㆍ유황 각 1냥과 황밀ㆍ검은 콩가루ㆍ역청 (여기서는 송지의 별칭) 각 2냥을 함께 사용하여 만들었다. 먼저 황밀과 역청을 녹여서 즙을 만든 다음, 나머지 재료와 함께 반죽하여 낡은 베를 불 위에 놓아 굳혀 초 심지를 만들어 불을 붙이면 바람이 불어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리초는 밀(蜜) 1근에 노란색 민들레꽃ㆍ주염꽃ㆍ송화(松花)ㆍ회화나무꽃 각 2전을 함께 넣어달여서 찌꺼기를 걸러내고, 대왐풀(난초과의 자란) 2전을 넣어 붉은 기운이 돌 때 식혀 만든 초로서, 만 리를 켜고 갈수 있다고 하여 만리초라 하였다.
성초는 황밀ㆍ송지(松脂)ㆍ다진 회화나무 열매 각 1근과 속돌 8냥, 단풍나무의 진 2냥을 함께 끓여서 7, 8치 정도의 작은 마디 대통에 부어 굳힌 것으로, 가운데 심지는 따로 박지 않고 초 끝에만 살짝 심지를 꽂아 불을 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성초 한 자루에 불을 켜면 약 10~20일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초는 송진이나 밀랍을 섞어서 만든 보다 좋은 초가 있지만, 소나 돼지기름을 이용해 만든 우지초ㆍ돈지초가 주로 이용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소나 돼지의 지방을 잿물에 넣고 끓여 찌꺼기 버리기를 서너 번 반복하여 깨끗한 기름을 걸러 낸 다음, 반으로 쪼갠 대통에 넣어 끈으로 묶어 굳힌 것으로, 심지는 면포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지초는 불에 잘 녹는 특성이 있어 빨리 닳고 헤펐지만, 특히 충남 공주지역의 우지초가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그 비법은 기름 찌꺼기를 걸러내는 요령에 있었다고 하며, 더러 초의 겉면에 붉은 물을 들이고 금박(갏箔)을 입힌 것도 있다.
잡초는 부들의 꽃가루와 회초리나무기름을 섞어 만든 것, 황경피나무 가루와 참기름 찌꺼기를 섞어 만든것, 그리고 쌀뜨물과 기름찌꺼기로 만든 초가 있었다.
마초는 삼대(麻莖)를 말려서 가지를 잘라 몽둥이 모양으로 만들고, 귀리 겨를 물과 버무려 삼대에 발라 말린 것이다. 그 길이가 1m 안팎 정도 되었다. 주로 함경도의 화전민 촌이나 여진계의 재가승 촌락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가옥 실내의 토벽에 구멍을 뚫고 이를 넣어서 불을 붙여 사용한 것이다. 아래쪽에는 마초에서 떨어지는 재를 받치기 위해 길이 120cm 내외의 통나무 통을 받쳐 놓기도 하였다.
[4] 전기역사를 찾아서 47 - 초[燭] - 우리 조상들이 사용한 여러 초들. Min, Byeong-Geun; / JOURNAL OF ELECTRICAL WORLD, sno.410, 8-9, February 20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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