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기능적 의미
저렴하고 휴대성과 보존성이 뛰어나 전등의 보급 이전에는 가정의 실용 조명으로 이용되었으나,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하여 일반 대중에 보급된 이후에는 정전 등에 대비하여 초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마저도 고성능 손전등의 보급과 함께 쇠퇴했다. 하지만, 양키갠들로 대표하는 향을 첨가한 향초가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촛불이 편안한 분위기로 만들어주는 감성적인 인테리어 연출도구로 재조명되면서 양초가 다시 한번 진화하고 있다. 미국양초협회(NCA)4의 자료에 의하면 미국에서 10가구 중 7가구가 초를 아직 사용하고 있고, 10명 9명은 집안의 분위기를 살리는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실용 조명
밝은 실내 조명을 선호하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와는 달리 어두운 실내를 좋아하는 서양문화는 21세기가 되어도 실내 조명으로 촛불을 이용하는 가정도 있다.
시계
초는 한때 시계로 사용되기도 했다. 초가 타는 시간에 따라 시간을 계산하고는 했다. 오늘날의 복잡한 문명 속에서도 초도 다양한 방법으로 생산되어 심지의 두께에 어떤 화학 처리를 했는지에 따라, 또는 주변 산소량에 따라 초가 타는 시간이 달라지고 일분일초의 미묘한 차이에도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사람들이 좀 더 자연과 친화되어 지내던 과거에는 달랐다. 양초,램프 등에 불을 붙여 그것이 탄 양으로 시간을 재는 불시계는 고대로부터 사용되던 시계다. 9세기 후반 영국 알프레드 왕은 양초시계를 자주 애용했다. 그가 좋아하던 양초시계는 약 30cm 길이에 12개의 눈금이 있었고 완전히 타는 데는 약 네 시간이 걸렸다. 이 양초시계는 정확한 분초는 알 수 없지만 약속을 정하고 이행하는 데 불편은 없을 정확도를 지니고 있었다. 중세에도 양초 시계와 램프시계는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었다21.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초에 금을 그어 촛불이 한치(寸) 타는 동안에 시를 짓게 하는 일종의 경시대회인 각촉부시(刻燭賦詩)가 있었다. 과거시험의 모의고사라고도 할 수 있는 각촉부시는 고려시대 사학(私學)의 하나였던 최공도(崔公徒)에서 널리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공도에서는 과거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매년 여름에는 귀법사(歸法寺) 승방(僧房)을 빌려 여름공부[夏科]를 실시하였다. 이때 최공도 출신 선배 가운데 과거에 급제하고 미처 임관되지 않은 자가 와서 구경삼사(九經三史)를 주로 한 특별지도를 베풀었으며, 이들 선배들이 내방하였을 때는 시짓기 경합인 각촉부시를 행하였다. 여기에서 우수한 작품을 낸 순서에 따라 방을 붙이고 조촐한 술자리도 마련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67년(세조 13) 경회루에서 친시(親試)를 보았는데 각촉으로 짓게 하여 4인을 뽑았으며, 1536년(중종 31)에도 역시 경회루에서 친시를 열어 각촉시로 허경(許坰) 등 4인을 선발하였다[1].
탈취
초가 탈 때의 탈취효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첫째, 초가 탈 때 완전연소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든 안보이든 그을음이 발생하게 된다. 이 그을음은 탄소(숯)의 작은 알멩이다. 이것은 다공성 물질이라 공기 중으로 확산하면서 냄새입자를 흡착하여 냄새를 제거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숯 1g의 표면적은 200~400m2로 그 속에 30평(99m2)형 아파트 2~4 채는 지을 수 있다. 둘째는 촛불의 연소과정에서 초가 타면서 산소도 소모하지만 공기 중에 섞여있는 냄새도 함께 연소되므로 냄새가 제거되는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다. 초가 타려면 주위의 산소를 빨아들여야 한다. 초의 주성분인 파라핀은 탄소의 함유량이 많은 탄화수소이기 때문에 초가 탈 때는 상대적으로 많은 산소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불꽃의 온도도 1,000도 이상으로 매우 높다. 그래서 주위의 공기를 맹렬하게 빨아들인다. 또한, 연소가 일어나는 지점은 심지의 끝 부분인데 담배연기 등 오염된 공기 속에 포함된 많은 물질은 고온의 불꽃을 통과하는 동안 냄새가 안나는 물질로 분해되어 방안 공기가 깨끗해지는 것이다[2].
§ 대변 볼 때 켜 놓으면 냄새걱정 싹
§ 담배 피울 때 초를 켜 놓으면 냄새 걱정 싹
§ '양파를 썰 때' 양초를 가까이 켜두면 매운 향도 잘 잡아줘서 눈물을 뚝뚝 흘리지 않아도 된다.
§ 습기 제거. 만약 비 오는 날 집안이 눅눅해졌다면, 양초를 켜보자. 습한 기운이 금방 없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광택방수
1980년대 이전 초등학교에 다닌 나이라면 등교 시에 쓰다 남은 초를 가져가서 방과 후에 교실 마루바닥을 초로 칠하고 마른 걸레로 문질러 광택을 내던 경험이 생각날 것이다. '구두의 광택'을 낼 때도 양초를 활용하면 아주 좋다. 광택도 없고 군데군데 가죽도 벗겨진 낡은 구두가 있다면 양초를 골고루 잘 발라주고 라이터의 불을 켜서 신발에 묻은 양초를 살짝 녹여준다. 어느 정도 양초가 녹았다 싶으면 깨끗한 천으로 구석구석 닦아주면 헌 구두를 새 구두로 변신시킬 수 있다. 문틀에 초를 문질러 문이 잘 미끄러지게 하기도 한다.
야외 활동에서 내수성 처리가 안된 지도의 앞 뒷면에 초를 칠하여 물에 젖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초의 방수성은 '화장실 청소'에도 활용 할 수 있다. 화장실 타일 사이사이 실리콘에 양초를 칠해주면 양초의 파리핀 성분이 코팅제 역할을 해주어 타일 이음새 부분에 세균이나 곰팡이가 자라는 걸 방지 할 수 있다. 화장실이 바싹 마른 상태에서 줄눈 부분에 칠해주면 된다.
향초
향초는 약 2000년 전에 서부유럽에서 초가 타면서 나는 불쾌한 냄새를 없애기 위하여 향을 내는 기름을 섞어 왁스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의 양초 시장의 75~80%를 차지하고 있으며 양초제조 업체는 방향제 업체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향초를 개발하고 있다.
최근 향초의 대명사로 말하는 양키캔들은 1969년 메샤츄세츠주의 Mike Kitledge가 17살 때 어머니에게 드릴 성탄절 선물로 만든 우유팩 향초로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국내에서도 양키캔들은 미국 출장이나 유학생들을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아는 사람만 아는 매니아층만을 위한 향초였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향초가 선물이나 문화적 취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초의 상징적 의미
초는 어둠을 밝히는 등기구이지만, 1834년 Joseph Morgan이 양초를 대량 생산하기 전에는 일반 대중들이 밤에 집안을 밝히는 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귀한 물품이었다. 초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상징으로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의 헌신적인 행동과 오랜 기간 동안 희생과 봉사 그리고 사랑의 상징이 되어오기도 했다. 아마도 촛불을 둘러싼 의미만큼 많은 대상도 없을 것이니, 종교적이거나 제의적인 의미,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는 생일이 되면 초에 불을 밝혀 생명의 탄생을 찬양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일 등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의 시책에 대한 다른 주장을 표현하기 위하여 난폭한 저항보다는 간절한 기원의 형식의 촛불집회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촛불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대체할 제품이 없어서 지금도 상품으로써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종교
기독교에서의 촛불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촛불은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모든 사함을 비추시는 분’예수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많은 초가 자신을 희생하여 인간의 죄를 사한 예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부활절에 사용하는 부활초(Paschale candle)가 있다. 부활초는 크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부활 성야에 특별한 예식과 함께 축성된 초로서, 보통 밀랍(蜜蠟)으로 만들어진다. 부활초가 만들어질 당시의 벌은 동정성(童貞性)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정배(淨配)인 동정 마리아에 비유하였고, 벌들의 밀랍은 동정 잉태의 결실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밀랍은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냈다. 결국 벌은 동정녀 마리아를, 벌의 밀랍으로 만들어진 밀초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부활초가 부활 성야 전례에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4~8세기경이었으나, 부활 전례에 본격적으로 되살아난 것은 최근 1955년 전례 개혁부터이다.[3]
불교에서 촛불은 무명을 밝히고 탐욕을 몰아내고, 어두운 사바세계를 밝히는 지혜의 빛으로 진리, 정의, 희생, 자비를 상징한다. 태국 불교에서 행하는 촛불행사 역시 지혜로움과 깨달으의 상징으로 촛불을 선택하여 그것을 꺼뜨리지 않고 오래 간직하며 행진하는 행사를 가진다. 사찰 참배 시에는 향과 함께 촛불을 촛대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촛불의 희미한 빛은 부처님의 자비에 의하여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하는 의미가 있고 조상이 자손에게 살 수 있는 빛을 도출하는 일종의 이정표로도 알려져 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초는 생명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동물성 기름이 아닌 식물기름에서 채취한 기음을 이용한 양초를 이용해 왔지만, 근대 이후 대부분 석유 파라핀으로 만들어진 양초를 사용한다. 현재 불교행사에서 초 색깔은 주홍(빨강)금 은흰색 등 4가지 색상이다[4].
§ 주홍: 제사(법회), 추석봄과 가을의 봉헌
§ 금색: 불전 결혼 식, 축제
§ 은색: 윤기 장례식
§ 흰색: 주로 사용하지 않지만 주홍금은초를 준비할 수 없을 때 대체품으로 사용
우리나라의 양초 소비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양초업계에서는 사찰에서 30% 정도를 소비하는 것으로 추정한다[5].
무속
무속에서 촛불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채체이다. 위령식에서도 촛불이 사용된다. 사고나 재해 현장에서의 위령행사 등으로 피해자의 수와 동수의 촛불이 밝혀진다. 고인을 기리는 전통행사나 전등 식에서도 많이 사용된다.
축제
초는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띄워주는 아이템이다. 많은 나라의 축제에서 초는 신의은혜, 생명, 행복 등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크리스마스를 지내지 않는 유대인들은 대신 ‘빛의 축제’라 불리는 ‘하누카’를 축제의 시간으로 보낸다. 8일간의 하누카 기간 동안 각 가정은 매일 하나의 촛불을 켜는 의식을 행한다. 첫째 날 중앙과 그 옆에 있는 초에 옯겨 다른 초에 불을 켠다. 촛불은 하누카의 상징 ‘하누키냐’이고 이것은 신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멕시코에서는 아즈텍 시대에서부터 유래된 전통 축제인 ‘죽은 자들의 날’이 있다. 죽은 자들을 기리는 행사로 11월1일과 2일 양일 동안 가족이 묻혀 있는 묘지에 찾아가 꽃을 놓고 촛불을 켠다. 그들은 제단에 켜놓은 촛불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안내 해준다고 믿는다. 태국력 12월 보름에 행해지는 태국의 대규모 축제 ‘러이 끄라통’은 강에 연꽃 봉우리 모양의 초를 띄우며 소원을 비는 행사이다.
‘끄라통’이라 불리는 작은 배에 불을 밝힌 초와 향, 꽃, 동전 등을 싣고 호수에 띄워 보내며 소원을 비는 데, 끄라통 안의 촛불이 꺼지지 않고 멀리 떠내려 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6].
생일 축하
생일 케익에 초를 꽂는 풍습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없지만, ‘아르테미스’와 ‘킨더페스트 (kinderfest)’라는 두 개의 단어로 설명이 가능하다[7].
음식문화평론가 윤덕노씨가 쓴 <음식잡학사전>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람이 태어나면 일생 동안 그 사람을 지켜보는 수호천사와 악마가 있다고 믿었다. 평소엔 교감할 수 없지만 생일에는 수호천사나 악마와 영적으로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거나 생일이 되면 오늘날의 케이크라 할 수 있는, 달 모양 빵을 만들어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갖고 가 아이의 안녕과 행복을 빌었다. 촛불은 소원을 신에게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생일 케이크를 자르기 전 소원을 빈 다음 촛불을 불어 끄는 이유가 여기서 유래했다.”
‘아동절(Kenderfest, 킨더페스트)’는 중세 독일의 풍습이다. 13세기경의 어느 날, 독일에서 아이의 생일 축하 잔치가 벌어졌는데 그 부모는 생일을 맞은 아이를 위 해서 그 나이에 하나 더 많은 양초를 케이크 위에 켜놓고 저녁까지 촛불을 끄지 않다가, 저녁식사 때에야 불을 불어서 끄게 했다. 한해라도 더 오래 살라는 장수의 마음을 생일을 맞은 하루동안 기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뒤 생일 케익에 초를 꽂는 풍습은 세계로 퍼졌는데 다만, 당시의 나이보다 초의 수를 하나 더 많게 하여 미래를 기원하던 것이 생일 맞은 이의 나이 수와 같도록 변질되었다. 초를 꽂아 불확실한 미래를 기원하는 마음이 전 세계로 그리고 오랜 시간을 두고 퍼지면서 현재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변질된 것이다.
촛불 집회
촛불은 종교적인 의미와 기원의 의미를 넘어서서 많은 사람이 모여 희망과 단결을 위한 집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하나의 촛불은 어둡지만 수십만의 사람들이 촛불 하나씩 들고 있을 때 그 어느 빛보다도 밝아지고 사회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위력을 발휘한다.
촛불 시위는 비폭력 평화시위의 상징이며, 주로 야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과시간을 마친 일반시민들이 참여가 용이하며, 촛불이라는 시각성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쉽다[8]. 요즘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촛불 문화재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진행하는 데, 해가 진 뒤에는 시위가 제한되는 법적인 제약을 피하기 위하여 야간에는 가수를 초대하거나 퍼포먼스를 공연하기도 한다.
1960년대 미국에서 반전운동으로 처음 촛불집회를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92년 온라인 서비스 유료화를 반대하는 시위가 최초의 촛불집회로 알려져 있다. 네티즌에 의해 주도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2002년에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두 여동생을 기리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서 크게 열린 촛불집회다. 당시 이 촛불집회는 오마이뉴스 게시판에서 ‘앙마’ 라는 ID의 네티즌이 2002년 11월 28일 촛불 추모집회를 제안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이 집회는 후에 가해자인 미군이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반미 집회로 번졌다.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열렸고, 2005년에는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가장 큰 파장을 일으켰던 촛불집회는 2008년의 광우병 파동 때였다. 광우병 촛불집회가 이전과 다른 점은 10대 여학생의 참여로 집회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2008년 촛불 집회에서는 여중고생들의 참여가 70%로 압도적이었다. 본격적인 모바일 폰의 SNS와 채팅 등을 이용하여 정보가 실시간 전파되면서 10대들의 약점인 시간과 경제성을 보완해 준 결과였다[9].
촛불집회는 새로운 시위 방식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촛불운동, 촛불민주주의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으며, 그 자체가 새로운 시민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 1988년 3월 25일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10]
§ 1992년 하이텔(한국PC통신)의 PC통신 유료화에 반대하는 집회
§ 2002년 2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추모 집회
§ 2004년 3월 ~ 4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통과 반대
§ 2004년 12월: 밀양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 2004년 11월 ~ 2005년 2월: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
§ 2008년 5월: 미국소 수입 협상 반대 시위[11]
§ 2009년 2월: 용산 참사 추모 촛불문화제
§ 2011년 : 반값등록금 공약 논란
§ 2013년 6월: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 촛불집회
§ 2016년 11월~12월: 최순실 게이트 규탄 박근혜 퇴진 촉구 촛불집회
https://ko.wikipedia.org/wiki/2008년_대한민국_촛불_시위
[2] http://www.science.go.kr/boardRead.bs?dataSid=3734&boardId=SCI_THEMELIFE&category=all&searchType=all&searchText=&pNum=85
[9]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xes2024&logNo=110127630564&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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